Andrew Carnegie (1835∼1919) 19세기 후반 미국의 철강산업을 거대하게 성장시킨 장본인, 당대 최고의 자선사업가. 기부금 지원을 통해 미국과 영국의 곳곳에 공공도서관 ‘카네기 도서관’을 설립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카네기의 어린 시절
앤드류 카네기는 1835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다.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변변한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마을 학교에 다닌 것이 그가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하지만 카네기는 어릴 때부터 말을 아주 잘 하고, 사람을 부릴 줄 알았다. 그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 많이 언급되는 일화가 있다. 당시 카네기의 집에서는 토끼를 키웠는데, 먹이를 구해다 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꾀를 내었는데, 친구들에게 클로버를 따다 주면 새끼 토끼에게 그 친구 이름을 붙여 주겠다고 한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학교를 안 가는 날이면 하루종일 토끼를 위해 클로버를 땄다. 카네기는 이 일을 두고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이 일을 귀중한 추억으로 여기고 있다. 내가 사물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나보다 사물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상대를 발견하는 재능 때문에 나는 성공할 수 있었다.”
카네기는 1848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면직물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한다. 고작 열네 살이었지만 그는 열심히 일했다. 지금이야 청소년들에게는 고된 공장 노동을 시키지 않지만, 1800년대 가난한 집의 십대 청소년들은 어른과 똑같이 혹은 어른보다 오히려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노동을 해야 했다. 카네기는 거의 걸레처럼 보이는 누더기 옷을 입고 면직물 공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얼마 후 카네기에게는 친구 보비를 얻기 위해 공장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보비는 그 공장에서 말썽꾸러기 직공이었다. 어느 날 그는 만만해 보이는 카네기에게 싸움을 건다. 싸움은 카네기의 승리로 끝나고, 둘은 친구가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평소 보비에게 불만이 많았던 공장장이 그를 해고한다. 해고당한 보비는 홧김에 카네기가 없는 사이에 그의 집에서 통장을 훔친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보비에게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그런데 카네기는 친구를 다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가 공장에서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다고 약속한다. 카네기는 약속대로 공장장을 찾아가 보비가 다시 일하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하지만 공장장은 끝내 복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보비와의 약속에 대해 말하면서 보비를 복직시키지 않으면 자신도 그만두겠다고 하자 공장장은 당장 나가라고 한다. 그 길로 카네기는 공장을 그만두고, 보비는 카네기의 이런 모습에 감동받아 이후 평생 카네기의 사업에 조력자 역할을 한다. 이런 사건이 있었던 것이 카네기가 열네 살 때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공 시대
카네기는 증기 기관사의 화부로 일을 시작한다. 후덥지근한 기관실에서 하루 종일 석탄을 퍼 넣는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일을 묵묵히 하는 모습을 지켜본 회사 사장은 카네기를 회계과 보조원으로 승진시킨다.
카네기는 나중에 이 일을 자기 인생의 출발점이자, 어두운 기관실에 비하면 하늘로 자리를 옮긴 것과도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는 회계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신문과 잡지를 읽는다. 많은 책을 접하면서 카네기는 조금 더 배우고 싶다는 욕심을 품는다.
하지만 회계 보조원 일을 하다 보니 도무지 읽고 싶은 책을 볼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을 그만두고 전신 배달부 일을 시작한다. 이 일은 쉴 새 없이 바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짬짬이 책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우선 전신 업무를 더 잘 해내기 위해 전신에 관한 책을 보기 시작한다. 전신 회사의 소장 앤더슨은 카네기의 열의에 호감을 느껴 자기 도서실에서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로써 그는 열일곱 살에 전신 기사에 버금가는 전신 지식을 쌓는다. 어느 날 전신 기사가 없는 사이에 급한 전신이 도착한다. 카네기는 그동안 배운 기술로 차분하게 전신을 받아 놓는다. 이 사실을 안 지배인은 카네기를 전신 기사로 채용한다. 그리고 얼마 후 철도부 관계자인 토머스 스콧은 그의 열의를 높이 사 철도부 전신 기사로 뽑아간다.
철도부 전신 기사로 일할 때 카네기의 능력을 보여 줄 사건이 일어난다. 지배인이 없는 사이에 열차 충돌이 예상되어 열차를 1시간도 넘게 대기시켜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지배인이 서명한 공식 열차 운행표가 있어야만 열차 운행을 다시 할 수 있었지만 카네기는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기로 하고 직접 열차 운행표를 짜서 사고를 방지한다. 이는 지배인의 권한을 넘본 것이기 때문에 혼날 것을 예상했는데 스콧은 사고를 치밀하게 잘 막아 주었다고 칭찬하며 카네기를 비서로 발탁한다.
1859년 카네기는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의 서부 지역 총책임자가 된다. 그가 사업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스콧으로부터 철도 회사의 주식을 받으면서부터이다. 한 달 만에 주식이 크게 올라 뜻밖의 이익을 보게 된 카네기는 이때부터 주식에 흥미를 갖게 되고 사업체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남북 전쟁은 미국인 대다수에게는 불행한 시기였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주위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카네기는 폭락한 철도 회사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여, 전쟁이 끝난 뒤 주가가 급등해 큰돈을 벌게 된다. 카네기는 전쟁이 끝난 후에는 목재로 된 교량을 철재로 바꿀 것이라고 예상하고 ‘키스톤 브리지 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가 미국 최초의 철재 교량인 오하이오 강 교량을 세운다.
카네기는 제철소, 광산, 원료 수송용 배 및 철도 등과 같은 강철 분야에만 사업을 집중시켰다. 이른바 문어발식 경영으로 닥치는 대로 여러 기업들을 합병하는 것이 아니라, 강철 분야와 관련 있는 사업에만 투자를 집중한 것이 카네기 경영의 특색이었다. 1890년 미국의 철강 산업 생산량이 처음으로 영국을 능가한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카네기 덕이었다.
기부 문화를 꽃피운 진정한 부자
1901년 카네기의 사업과 기업가로서의 경력은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기업을 다른 강철 회사에 매각한다. 그리고 매각 대금으로 받은 5억 달러를 자선 사업에 내놓는다. 그는 청년 시절 자신에게 도서관 문을 열어 주었던 앤더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런 마음을 영국, 미국, 캐나다 등의 3,000여 도서관 설립 지원을 통해 드러냈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해 기금을 조성해 연금 제도를 마련했다.
현재 뉴욕카네기재단의 기금은 문화 사업, 지식 전파에 쓰이고 있다. 카네기기술연구소는 맬런 대학의 일부로 세계 평화에 관심이 많아 ‘국제 평화를 위한 카네기 기금’을 조성해 ‘헤이그 평화 회의’와 같은 평화 활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카네기가 자신을 위해 전혀 돈을 쓰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쉰 살이 넘어서 결혼한 그는 말년의 행복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거대한 저택을 지었다. 카네기의 어머니는 그가 결혼하기 직전에 돌아가셨는데, 사는 날까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의 아들도 보통의 재벌 아들이 누리는 것을 모두 누리며 살았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비난하려 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놔두게. 내 아버지야 가난했지만, 그놈 아버지는 안 그렇잖은가.”
하지만 카네기 자신은 대단히 검소했고, 유행에 따르지 않았으며, 격식만 차리는 상류 사회의 삶을 싫어했다. 그래서 사교계에도 나가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재벌 가문에 시집보내지 않고, 평범한 가문 출신이지만 유망한 청년 철도 감독과 결혼시켰다.
젊은 시절 철도 선로에서 일하면서 꾀부리지 않고 일한 덕에 카네기는 부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평생 그를 쫓아다닌 병도 얻었다. 그때 얻은 일사병으로 더운 날 카네기는 녹초가 되곤 했다. 이런 고통에 시달렸어도 카네기는 1919년 사망하는 날까지 목표를 이룬 성취감을 누리며, 마음 따뜻한 자본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한 사회에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 사회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사회에 부를 되돌려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사회에 자신의 부를 환원하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세금을 정직하게 내기만 해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대단하다고 칭찬받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강제하는 이런 방법들이 아니라, 자신이 이룬 부를 자발적으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선 행위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한다.
이 글을 읽는 분이나 이 글을 쓰는 필자나 몇 년 혹은 몇십 년 뒤, 혹은 지금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그것은 금전뿐 아니라 재능일 수도 있고 능력일 수도 있고 정성일 수도 있다.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살면 좋겠고,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을 기꺼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줄 알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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