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lson Mandela (1918∼2013)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인권운동가. 1993년 클레르크 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아프리카 자유을 향한 물결
넬슨 만델라의 생애가 펼쳐진 곳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 남쪽 끝에 있는 나라이다. 인구가 6,1000만 명 정도(2024년 현재)이며, 인구 대부분이 흑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남아프리카의 기득권은 백인들이 쥐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제국주의 통치의 잔재가 너무 강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백인을 흑인, 그 밖에 유색 인종 및 아시아 인종과 구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식의 카스트 제도를 버젓이 도입하고 있었다. 단지 노예 제도라는 이름이 쓰이지 않았을 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런 악습들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흑인들이 아무리 대항해도 이러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를 위한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무수히 많은 흑인 지도자들과 시민들의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나왔다. 1960년에는 루툴리가, 1984년에는 투투 주교가, 그리고 1993년에는 만델라와 F. W. 드 클레르크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루툴리는 아프리카 민족 회의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에 대항한 저항 단체의 의장을 맡은 사람이다. 그는 흑인 광부들의 파업 진압 과정에서 1,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 불공정한 법률을 거부하며, 500여 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걸어서 감옥에 들어간 운동 속에서도 결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자유란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투투 주교는 세계 교회 협의회,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 등의 종교계 활동을 통해 남아프리카 흑인의 권리를 옹호한 사람으로, 그 또한 백인과 흑인 공동체가 협상을 통해 화합할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 주었다.
드 클레르크는 수상자 중 유일한 백인이자 만델라의 전임 대통령으로 아파르트헤이트 흑인에 대한 인권 차별 정책을 철폐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만델라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만델라도 처음에는 이들처럼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자유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백인들이 순순히 흑인에게 권리를 넘겨주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으면서 무력을 사용하고, 그 일로 무려 27년 동안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야 했다.
흑인 법률가란 백인들의 법을 지켜 주는 한낱 심부름꾼
넬슨 만델라의 생애는 이렇게 시작된다.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케이프타운 동부에 있는 트란스 케이의 쿠누라는 외딴 마을에서 템부 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다.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을 품은 채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에게 선생님은 넬슨이란 영어 이름을 지어 준다. 만델라는 자신이 왜 영어를 배우고 영국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 이상할 뿐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헬드 타운의 기숙사 학교에 입학한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선교사들은 백인이 아프리카 흑인의 해방을 도왔다고 가르쳤다. 미개인이었던 원주민에게 문명을 전달해 지식을 얻게 하고, 의료 혜택도 받을 수 있게 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만델라는 이런 가르침에 침묵으로 자신의 항변을 대신한다.
만델라가 대학에 들어갈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흑인 학교와 백인 학교가 구분되어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 대학인 포트헤어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백인 학생들이 정부의 지원 아래 질 높은 교육을 받는 데 반해, 흑인 학생들은 모두 학비를 내고 다니면서도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그 모습을 보자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들이 일시에 폭발하여 흑인과 백인 사이의 평등을 위한 시위를 벌인다. 그 결과 만델라는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만델라는 어린 시절부터 법률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버트바터스란트 대학교에 들어가 1942년 마침내 오랜 염원이던 법률 학위를 따낸다. 변호사가 되어 억울하게 빼앗기고 짓밟힌 흑인들을 변호하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그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법률 사무소를 차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인을 위해 만든 법 전체를 고치지 않고서는 흑인을 위한 변호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흑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변호하겠다는 자신의 꿈이 애초부터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정해진 법을 지키며, 그 안에서 천천히 흑인들의 권리를 찾아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잘못된 법의 피해도 차츰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은 백인 독재의 나라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된 것을 후회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흑인 법률가란 백인들의 법을 지켜 주는 한낱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더군요.”
만델라는 조용히 법률 사무소 문을 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아프리카 민족 회의에 가입한다.
350년 동안 지속돼 온 인종 차별 정책이 철폐되다
아프리카 민족 회의란 흑인들의 인권을 지키고 찾기 위한 정치 단체이다. 1912년에 창설되었으니 매우 긴 역사를 가진 단체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민족 회의에 가입한 만델라는 처음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잘못된 법을 어기는 운동, 즉 백인들의 물건을 사지 않고, 백인들의 공장에서는 일손을 놓아 버리고, 정부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도록 시위를 주도했다. 루툴리처럼 평화적인 운동을 펼친 것이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하는 인종 분리 정책이 실시되고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란 아프리카어로 ‘분리’라는 의미로 백인을 위한 법을 뜻했다. 아프리카 흑인과 혼혈 인종, 아시아 인으로 유색 인종을 분류해 주민 등록을 하게 한 뒤, 이들을 백인과 분리시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차별 대우를 하는 법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다른 모든 나라들은 인종 간의 차별, 남녀 차별 등을 서서히 줄여 나가고 있는 데 반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식민 통치를 하던 소수의 백인이 대다수의 흑인들을 여전히 지배하려 한 것이었다.
만델라는 인종 분리 정책의 철폐를 호소하며,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에 흑인도 들어가자는 운동과 신분증 없이 거리를 다니자는 운동 등 평화적인 시위 방안을 모색한다. 그러나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갖추어 백인과 맞서 싸우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폭력은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하고 무력으로는 결코 백인 군대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당시 아프리카 민족 회의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었다.
1960년 어느 날, 백인 경찰들이 흑인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아 69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부터 만델라는 평화적인 인권 운동의 길을 포기하고 무장 투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무장 투쟁이 계속되자 백인 정부는 아프리카 민족 회의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여 탄압하기 시작하고, 그들은 지하 기지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 밖에서 활동을 해야 했다. 그래서 아프리카 민족 회의는 본부를 잠비아에 두고, 앙골라와 탄자니아에 군사시설을 갖춘다.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 회의의 무장 조직인 ‘민족의 화살’이라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며 사령관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1964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이나 감옥에 갇힌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흑인 인권 운동은 계속되었다. 특히 1976년 소웨토 봉기라 부르는 대규모 흑인 운동이 일어난다. 백인 경찰과 군대는 이 봉기에 가담한 사람 중 600여 명을 참혹하게 학살한다.
이를 계기로 국제 사회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비난하지만 보수적인 백인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외에 있는 아프리카 민족 회의의 기지를 공격하며 흑인들의 분노를 살 뿐이었다.
영원히 바깥세상의 빛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만델라를 27년 만에 감옥에서 풀어 준 사람은 백인들이 뽑은 대통령 드 클레르크였다. 1989년에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평화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흑인과 백인이 서로 화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35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고 흑인에게도 정치적 권리를 인정한다.
1990년 그가 만델라를 석방하고 아프리카 민족 회의 등 그동안 정부에서 탄압했던 단체들을 인정해 준 후, 화해 정책은 더욱 발 빠르게 진행된다. 1991년 인종 차별을 위한 주민 차별법을 폐지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주화 개혁을 위한 투표를 실시한다. 백인들만 참여한 투표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백인들도 흑인이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94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만델라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다.
모든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델라의 일생은 음습한 감옥에서의 인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지하 운동으로 채워졌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가시밭길 같은 삶으로 내몬 것일까?
만델라는 백인으로부터 억울하게 자유를 억압당하는 삶에 종지부를 찍고 더 이상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민족을 위해 일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민족만을 위해 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일 흑인들이 억울하게 당했다고 해서 백인에 대해 보복하려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평등을 바랐다. 인종이나 태생을 문제삼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는 삶을 꿈꾸었을 뿐이다. 이것이 그가 민족을 위해 살았지만 흑인만이 아닌 전세계인의 가슴에 존경심을 불러일으킨 이유이다.
어떤 민족주의자는 자기 민족의 이익만을 옹호하면서 침략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한다. 그것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면서 세계사에 커다란 상처를 안겨 주었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방인을 학대하는 행위는 진정으로 민족을 위하는 태도가 아니다.
만델라의 삶을 통해 민족을 위해 살아가는 일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다면 그의 삶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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