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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롤모델 이야기/지도자형 위인 롤모델

마틴 루터 킹- 평화를 꿈꾼 인권운동가 - 마틴 루터 킹의 생애

by 백패커 소크라테스 2024.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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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Luther King (1929∼1968) 미국의 목사, 인권운동가.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86년 미국 의회는 그를 기리기 위하여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

 

미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큰 나라지만 그에 반해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 역사의 시작은 영국에서 탄압받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이주한 1620년이나,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1776, 또는 13개 주 대표가 참가한 대륙 회의가 헌법을 공표한 1787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출발할 때부터 민주주의를 표방하였다. 미국 독립 선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하느님은 그들에게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가 포함된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부를 만들었다.…… 정부가 이런 목적을 파괴할 때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를 변혁 내지 폐지하고, 정부를 새롭게 조직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당시 한낱 위선에 불과했다. 그들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25,000명에 이르는 체로키 인디언들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선포를 하면서도 노예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해리엣 비쳐 스토우가 쓴 반노예제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1852년에 발간된 이 소설은 물건처럼 이리저리 팔리는 흑인 노예의 삶을 통해 백인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있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 책을 읽고 분노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흑인 노예에 대한 깊은 동정이 싹트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노예 제도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이런 상황에서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을 선언한다. 그 후 흑인들은 노예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국 사회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공화당. 급진파가 남부 백인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메리카 동맹을 결성했을 때, 남부 백인들은 KKK 단을 결성한다. ‘KKK’집단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kyklos’를 변형시킨 ‘Ku Klux Klan’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1866년 남부 테네시의 작은 도시 플라스키에서 출범한 KKK 단은 장대 끝에 해골을 매달고 흰 삼각모와 수의를 입고 다니면서 흑인들을 공포에 빠뜨렸고, 심지어 살인과 방화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흑인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던 보이지 않은 폭력이었다. 그들은 투표권을 부여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백인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다. 또 백인과 같은 레스토랑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심지어 화장실조차 분리되어 있었다. 이것이 자유의 나라 미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인종 차별의 한 단면이다.

 

뉴욕 할렘에 있는 마틴 루터 킹 거리 표치판이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틴 루터 킹의 아버지 마틴 루터 킹 1세는 소작인 집안에서 태어나 다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백인들에게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하며 성장한다. 어느 날 농장 주인이 아버지의 돈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을 본 마틴 루터 킹 1세는 농장 주인에게 항의한다. 하지만 농장 주인은 오히려 자네, 이 검둥이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내 주먹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라고 아버지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음을 느끼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을 떠나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애틀랜타로 향한다.

 

기댈 곳이라고 전혀 없었던 어린 소년은 기능공 조수와 소방대원으로 일한다. 당시 그를 지탱해 준 것은 교회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는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었지만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마침내 교회에서 설교할 자격을 얻는다. 몇 년 후 애틀랜타에서 가장 큰 흑인 교회 중 하나인 에베네저 침례 교회의 부목사로 임명된 마틴 루터 킹 1세는 목사의 딸 앨버타 윌리엄스와 결혼한다.

 

첫딸을 낳은 뒤인 1929115일 아들 마틴 루터 킹을 얻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았고, 성경을 즐겨 읽었으며, 다섯 살도 되기 전에 찬송가를 외워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런 그에게 인종 차별 문제가 피부에 와닿은 계기는 여섯 살 때였다. 세 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백인 친구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갑자기 우리 아버지가 이제부터 너랑 놀지 말래라며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울먹이는 마틴 루터 킹에게 부모님은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알려 주면서도 백인을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그에게 이상하게 들릴 뿐이었다.

 

마틴 루터 킹은 애틀랜타의 흑인 소년과 소녀를 위해 세운 공립학교에 진학하는데, 이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포스워드에서 웨스트사이드 방향으로 버스를 타야 했다. ‘분리된, 그러나 평등한이라는 구호를 내건 흑백 분리 정책으로 버스의 맨 앞쪽에는 백인이, 뒤쪽에는 흑인이 탔다. 아무리 앞자리가 비어 있어도, 흑인은 앞에 앉을 수 없었다. 이런 경험 외에도 마틴 루터 킹은 경찰들이 흑인들을 얼마나 잔혹하게 다루는지, 그리고 법정에서 흑인들이 얼마나 부당한 판결을 받는지를 보며 자란다.

 

그렇지만 그에게 희망을 준 경험도 있었다. 대학 진학 전, 코네티컷 주에 있는 담배 농장에서 일하면서 그곳 흑인들이 애틀랜타의 흑인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백인들과 똑같이 최고급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고, 뉴욕발 워싱턴행 기차에서는 인종에 관계없이 원하는 좌석에 앉을 수도 있었다. 돌아올 때는 흑인 전용 객차로 옮겨 타야 했지만 말이다.

 

그는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노력하면 흑인의 처지가 좀 더 개선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는다. 마틴 루터 킹은 고등학교 졸업 후, 법률가가 되기 위해 모어하우스 대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여러 사상들을 접하면서 그는 성직자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고, 졸업 후 크로저 신학교를 거쳐 보스턴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한다.

 

자유를 위한 투쟁

 

보스턴에서 마틴 루터 킹은 매력적인 흑인 여대생 코레타 스콧에게 매료된다. 그녀도 애틀랜타 출신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혼하여 마침내 결혼 승낙을 받아낸다. 1953년 아버지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 있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 교회에서 그들만의 둥지를 튼다.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은 처음엔 흑인 교회의 열광적인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교회에서 다음 한 주일을 견딜 힘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그의 설교는 흥이 넘치고 유쾌하게 변해 간다.

 

마틴 루터 킹은 이 무렵 사회적 실천 위원회를 조직하여 유색 인종의 지위 향상을 위한 전국 연합회 NAACP를 지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바 몽고메리 기적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 터진다. 이는 NAACP 지부의 비서로 일하던 로자 파크스 부인이 퇴근길에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끌려간 사건이다. 사실 이 사건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같은 이유로 어떤 흑인은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은 파크스 부인이 기소된 사건을 계기로 버스 타지 않기 운동을 벌인다. 당시 버스 승객의 70퍼센트 이상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1955125일 월요일 새벽부터 시작된 이 운동에 흑인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출근한다. 계속된 시위 기간 동안 사람들은 지칠 법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걸었다. 한 택시 운전사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걷는 늙은 부인을 태워 주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식들과 나의 손주 녀석들을 위해 걷는 것입니다. 내 두 발은 몹시 피곤하지만, 내 영혼은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군요.”

 

얼마 후 이 일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마틴 루터 킹의 집은 총격을 당하고, 여러 교회와 흑인 목사관이 총탄 세례를 받는 일이 벌어진다. 이때 마틴 루터 킹은 주여, 지금 몽고메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자유를 향한 투쟁으로, 누군가가 죽는 일을 저는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라고 기도를 한다.

 

마틴 루터 킹은 거의 1년 동안의 기나긴 투쟁 끝에 대법원으로부터 앨라배마 주의 인종 차별 법령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낸다. 그렇다고 앨라배마 주 백인들의 태도가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흑인들은 분명히 변해 있었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되찾게 되었고 자존심을 지켜야겠다는 의식을 갖는다. ‘몽고메리 기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마틴 루터 킹도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신변 위협 또한 커져 갔다. 몽고메리 기적에 대해 책을 써 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을 펴낸 그가 책의 판촉 여행 중 뉴욕의 어느 백화점에서 사인회를 가질 때였다. 서명을 받으려고 서 있던 한 젊은 여성이 자기 차례가 되자 갑자기 칼을 꺼내 그의 가슴을 찌른다. 그녀는 정신병을 앓던 사람으로 곧 병원에 수용된다.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한 운동에는 흑인만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으로 이루어진 자유의 기수들이라는 이름의 인권 운동가들이 1961년 봄, 버스를 타고 남부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흑백 인종 차별의 분위기가 얼마나 변했는지 조사한다. 그러나 백인 테러단들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앨라배마 주 애니스턴에서 그들은 첫 번째 버스에 불을 지르고, 버밍햄에서는 두 번째 버스에 쇠파이프와 자전거 체인 세례를 하며 위협했다. 백인 구급차는 상처 입은 자유의 기수들의 호송을 거부했다. 결국 그 지방의 대학생들이 버밍햄에서 몽고메리까지 버스를 몰았다.

 

워싱턴 D.C.의 마틴 루터 킹 메모리얼.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 있었던 '일과 자유를 향한 행진'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기리고 있다.미국에서 1964년 드디어 흑인에게도 시민권이 부여된다.

 

몽고메리에서 또다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이 광경은 신문과 텔레비전을 타고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폭력에 분노하면서 흑인의 시민권을 보장하자는 데 점점 공감한다. 물론 남부 지역 사람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지만, 흑인 인권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목소리는 점차 힘을 얻는다.

 

마틴 루터 킹은 이제 정부가 아니라, 상점이나 일반 회사로 방향을 돌린다. 그리고 196343버밍햄 선언을 발표한다. 간이식당과 화장실, 그리고 식수 사용에 있어서 인종적 차별을 철폐하라. 상업 지역이나 산업 현장에서 흑인들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하라. 버밍햄의 완전한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해 흑인이 함께 참여하는 위원회를 설치하라등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요구를 받아들일 때까지 시위와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고 선포한다.

 

이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수십 명의 인권 운동 지도부 인사가 투옥되었고, 학생들은 대대적으로 지지 행진을 벌인다. 그런데 학생들의 시위 행렬을 향해 버밍햄 경찰 국장 유진 코노는 소방 호스를 틀라는 명령을 내린다. 거센 물줄기 때문에 어떤 학생은 건물 벽으로 날아가 부딪치고, 어떤 학생들은 옷이 벗겨지고 땅바닥에 쓰러진다. 진압 부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경찰견을 풀어 행진에 가담한 흑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미국의 많은 시청자들은 자기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참혹한 행위를 지켜보았고, 여론에 힘입어 1964년 드디어 흑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법안이 통과된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은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뒤에도 마틴 루터 킹의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짓밟힌 인권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흑인뿐만 아니라 인디언들, 라틴 아메리카계 사람들, 애팔래치아 산골의 백인들 등 여러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행진을 계획한다.

 

그러던 196844일 멤피스의 어떤 호텔 발코니에서 집회 계획에 대해 의논하던 중, 갑자기 날아든 총탄이 마틴의 얼굴을 관통한다. 쓰러진 인권 지도자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마틴 루터 킹이 남긴 기록을 모두 모아 자서전 형식으로 엮은 책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소망을 밝힌다.

 

지금 지구상에는 박격포가 터지고 총탄이 날아다니지만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거리에서 부상당한 채 뒹굴고 있는 정의는 언젠가는 더러운 치욕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언젠가는 전세계 민족들이 신체를 위하여 세끼 식사를 하고, 정신을 위하여 교육과 문화를 향유하며, 영혼을 위하여 인간적 존엄과 평등,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언젠가는 타인 중심적인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에 의해 찢긴 대의를 바로잡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류가 신의 제단 앞에 엎드려서 전쟁과 유혈을 뛰어넘어 승리를 거둘 것이며, 비폭력적인 호의가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승리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당당히 맞설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워싱턴 D.C. 마틴 루터 킹 메모리얼 거대 석상의 일부 모습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종 차별 철폐를 부르짖었던 마틴 루터 킹의 꿈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타인을 향한 혐오와 폭력이 난무하는 지금이야말로 그의 가르침이 가장 절실한 때인지 모르겠다.

 

워싱턴 D.C. 마틴 루터 킹 메모리얼의 거대한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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