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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롤모델 이야기/지도자형 위인 롤모델

간디 - 인도의 진정한 영적 지도자 - 간디의 생애

by 백패커 소크라테스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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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atma Gandhi (1869∼1948) 영국의 지배 가운데 비폭력 저항 운동을 지도한 인도의 정치가이자 민족 운동 지도자. 마하트마는 위대한 혼 또는 큰 성인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근대사는 식민지의 역사였다

 

때때로 어딘가 여행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은가? 그중 많은 사람들은 물질문명과 오락적 재미가 넘쳐나는 곳보다는 이집트나 인도처럼 아직 문명의 위력이 미치지 않은 오지 혹은 고대 문명이 탄생한 유적지에 가고 싶어 한다. 특히 인도는 지금까지도 고대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곳이기에 우리를 더 유혹한다.

 

우리는 간디의 생애를 알기 위해 먼저 인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도는 종교의 나라이다. 힌두교도가 우세하지만 그 밖에도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기독교, 시크교, 조로아스터교 등이 신봉되고 있다. 종교만 다양한 게 아니다. 인종 박물관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많은 종족이 살고 있으며, 인도 정부가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는 언어만 해도 18개에 이른다. 그리고 2024년 현재 인도의 인구는 중국을 능가하고 있다. 

 

이런 다양성 때문에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우리는 인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흩어지지 않는 것은 인도 문명이라고 하는 단단한 연결 고리 덕분이다. 인도 문명은 기원전 2500년에 형성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단절도 없이 이어진 유구한 문명이다. 특히 4세기 무렵부터 체계화된 힌두교는 인도를 하나의 인도로 통합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되었다.

 

힌두교도들의 축제인 마하 쿰 멜라. 인도 네 개 도시를 3년마다 돌아가며 열린다. 죄를 사함 받는 의식이다.

 

그러던 중 13세기 초에 이슬람교를 믿는 이민족이 인도에 들어오면서 이후 500년 동안 인도의 지배층을 이룬다. 게다가 15세기 말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상인들이 향신료나 면직물 무역을 위해 인도로 몰려들었다가 점점 인도를 손에 넣으려고 싸움을 벌인다.

 

인도의 근대사는 식민지의 역사였다. 인도에는 향신료와 면직물이 많았기 때문에 인도 항로를 가장 먼저 개척한 포르투갈인들이 무역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스페인과 네덜란드인이 가세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6세기 중반부터 영국 상인들의 해상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600년경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상인들에게 동인도 무역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특허장을 내준다. 이를 계기로 동인도 회사가 형성되는데, 이는 하나의 주식회사일 뿐이었지만 그 역할을 넘어서서 이후 몇백 년 동안 영국 제국주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도구 역할을 한다.

 

인도에 진출해 있던 유럽 각국은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끊임없이 대립하지만, 최종 승자는 영국이었다. 특히 1757년에 있었던 플라시 전투는 영국이 인도와 무역을 하는 차원을 넘어 인도를 지배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 전투는 인도 벵골의 토후와 프랑스군이 연합하여 영국군과 대결한 전투였는데, 3,000명의 영국군이 5만 명의 연합군을 하루 만에 격퇴시켜 승리로 이끈다.

 

이후 영국은 벵골 지방을 거점으로 하여 인도 지배권을 확립하면서 총독 정치를 시작한다. 영국은 인도 토후 세력들의 영토를 조금씩 빼앗는 방법으로 인도 전역을 점차 식민지화해 나갔다. 그리고 인도의 자급자족 경제를 점차 흔들어 영국 경제에 예속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인도인들은 세포이 인도 용병 반란과 같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지만, 오히려 영국 정부의 직접 지배가 더 공고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국의 지배가 길어지면서 인도인들은 점점 영어와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뚜렷이 일어난다. 1870년대가 지나면서 영어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영국에 대한 협조적인 태도를 버리고 대대적으로 비판자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게다가 1860년에서 1870년 사이에 네 차례나 기근이 들어 농민들이 산발적인 폭동을 일으킨다.

 

이에 영국 정부는 영국과 인도 농민을 이어줄 집단을 생각하다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국민회의라는 단체를 만든다. 하지만 국민회의의 구성원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고칼레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영국 의회 정치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 인도의 정치적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온건파가 있었는가 하면, 티락 등이 이끄는 급진파는 영국에 대한 투쟁 활동을 통해 인도 자치를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1905년 커즌 총독이 벵골 주가 너무 넓다는 이유를 내세워 인도의 분리를 추진한다. 하지만 인도인의 눈에는 이것이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조치로 보였다. 이를 계기로 국민회의의 급진파가 저항 운동을 시작한다. 저항 운동의 구체적인 형태는 국산품만 사용하자는 스와데시 운동, 외국 상품을 배척하는 보이콧 운동, 민족 교육 운동, 그리고 자치를 실현하려는 스와라지 운동 등이 있었다. 바로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간디가 태어난다.

 

인도 독립운동의 원칙, 아힘사를 실천하다

 

간디를 부르는 또하나의 명칭인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타고르(인도의 시인, 사상가, 18611941)가 간디를 칭송한 시에서 시작되었는데, 그의 삶을 살펴보면 이 별명이 그에게 결코 과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디는 1869년 인도 서부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난다. 본래 이름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이다. 그의 아버지는 힌두교 자이나파를 신봉하는 바이샤 계급 출신이었으며, 어머니도 엄격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간디는 부유하고 교양 있는 가족들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다.

 

당시 인도에는 조혼 풍습이 있어서 간디는 여덟 살 때 동갑인 카스 투르바이와 약혼하고 열세 살에 혼인한다. 열일곱 살이 되자 아메다 바드의 사말다스 대학에 입학하지만 대학을 마치지 않고 중퇴한 뒤, 1888년 변호사 수업을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3년 뒤 변호사 자격증을 따서 귀국한 간디는 봄베이 고등 법원의 변호사가 된다. 그런 간디에게 인도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친 사람은 국민회의 온건파의 지도자 고칼레와 인도 민족주의의 창시자인 다다바아이였다. 다다바아이는 간디에게 항상 아힘사를 실천하라고 가르친 사람이다. 아힘사란 생명에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1893년부터 시작된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의 원칙이었다.

 

이 사상에 영향을 받은 간디의 독립 운동은 크게 1893년부터 1914년까지 남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때와 1915년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 인도를 무대로 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랑과 평화를 실천한 간디

 

1893년 간디는 소송 사건을 의뢰받고 1년 계약으로 남아프리카로 간다. 이 무렵 남아프리카에는 약 15만 명의 인도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당시 그곳에 살고 있는 동족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남아프리카에 사는 백인들은 외국인들을 대단히 배척했다. 유색 인종들에 대해 무거운 세금을 매기는 등의 공공연한 억압뿐만 아니라 모욕과 약탈까지 일삼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에 도착한 간디는 그들이 받던 박해를 고스란히 경험한다. 호텔 현관이나 기차역에서 따돌림 당하고 욕설을 듣고 심지어 얻어맞기까지 한다. 처음에는 그런 일들에 지쳐 인도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1년 동안 생활하면서 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의 인권을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변호사였던 그가 할 수 있는 투쟁 방법 중 하나는 아시아인을 배척하도록 되어 있는 법률의 부당성을 밝히는 일이었다. 간디는 소송을 걸었고, 이 소송에서 결국 승소한다. 이후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조직을 결성하는가 하면, 인도 교육 협회를 창설하고, 인디언 오피니언이라는 신문도 창간한다.

 

1906년 남아프리카의 트란스발 주에서 아시아인 차별을 위한 아시아인 등록법이 제정된다. 이에 대항해 싸우다가 간디는 여러 차례 투옥된다. 1913년 간디의 지도 아래 4,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탈 주에서 트란스발 주까지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행진을 벌이고, 이일을 계기로 아시아인 구제법이 제정된다. 인도인은 3파운드씩 내야 했던 인두세(人頭稅, 납세 능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각 개인에게 일률적으로 매기는 세금)를 더 이상 내지 않아도 되었으며, 나탈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노동자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간디가 20년 동안 남아프리카에서 벌인 투쟁의 결실이었다.

 

한평생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삶을 살다

 

1915년 간디는 인도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치 활동을 시작하지는 않고 전국을 돌면서 강연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1917년 어느 날, 참파란 지방에 있던 농민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착취에 대해 호소하기 위해 간디를 찾아온다. 그 지방에서는 쪽(한해살이풀)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유럽인 재배주들이 쪽값 하락으로 입은 손실을 농민들에게 떠넘겨 소작료를 턱없이 올려 받았다는 것이다. 간디는 압력을 받으면서도 사건을 정확히 조사해 재배주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이후 소작인들은 간디를 해방 투사로 생각하게 되고, 그는 갑자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부각된다.

 

한편 간디는 가난한 사람들이 입은 옷과 똑같은 옷을 입고, 기차의 3등 칸을 이용했다. 이런 소박한 간디의 모습이 민중에게 신뢰를 주면서 이제까지 인도 중간 계급이 주도해 왔던 독립운동이 민중 운동으로 확산된다.

 

간디는 자신의 저항 정신을 사티아그라하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진리 파악이라는 뜻의 인도어다. 진리란 신에게 충실한 생활과 비폭력의 행동 방식을 뜻한다.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목적은 옳지 않은 일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인들은 영국에 헌신적으로 협조했다. 그런데 오히려 영국은 인도인과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이에 인도인들은 영국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국민회의의 지도자였던 고칼레와 티락이 죽었기 때문에 이제 인도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간디였다.

 

이 무렵 간디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서로 다른 인종, 종교, 카스트 집단 사이의 조화와 협력이었다. 여러 집단의 협조 속에서 영국에 대한 비협력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다. 세금 내는 일을 거부하고, 영국인이 경영하는 공장에 취업하는 것을 거부하며, 영국인이 만든 상품을 사지 않는 등의 저항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간디는 여러 차례 투옥된다. 하지만 그의 투쟁은 그칠 줄 몰랐고, 오히려 지금까지의 비협조 운동보다 더 적극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였다.

 

사람은 소금 없이는 못 산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 바닷가에 굴러 다니는 소금을 주워 사용해도 사람들을 구속했다. 이런 상황에서 간디는 일부러 바닷물로 소금을 만드는 시위를 벌인다. 이 시위에 대규모의 사람들이 참여하는데, 이것은 총독 정부에 대한 전쟁 선포와 같은 것이었다. 간디는 즉시 구속되었고, 인도인들은 그의 구속에 저항해 파업과 분규를 일으킨다. 결국 총독은 간디와의 회담 후 투옥자 대부분을 석방하기로 하고 소금을 가정용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한다.

 

간디가 1932년부터 벌인 투쟁은 천민의 처우 개선 문제였다. 힌두교에서는 특정 천민에게 손조차 대지 말라는 규율이 있다. 천민은 일반 사람처럼 우물도 사용할 수 없었다. 간디는 영국이 인도인을 천민 취급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외치면서 이런 폐습을 없애자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이들에게도 지방 의회의 의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디의 투쟁은 또다시 승리한다.

 

갠지즈 강의 모습

 

간디의 투쟁이 계속되던 중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그런데 영국은 인도인이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인도 국민이 독일과의 전쟁에 참여한다고 선포해 버린다. 국민회의는 나치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긴 했지만 지신들과는 아무런 협의 없이 한 전쟁 선포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인도의 완전 독립을 약속하기 전에는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고 전쟁 비협조 투쟁을 벌인다. 그런데 이때를 틈타 힌두교와 대립하고 있던 이슬람교 인사들이 두 개 민족 이론을 내세우며 영국으로부터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는다. 이들은 이슬람교끼리 인도에서 따로 분리 독립하자고 결의한다. 이것이 파키스탄 결의.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서둘러 정권을 인도로 넘기는데, 그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독립하기를 요구한다. 간디는 분할 독립에 반대했지만, 19478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은 200년 간의 긴 영국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다. 간디는 해방을 본 이듬해 1, 한 극우파 청년이 쏜 총탄에 맞아 생을 마감한다.

 

그의 생애는 정치적 투쟁의 삶이었다. 우리는 흔히 정치인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 때 권력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도덕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더욱 간디의 삶에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된다.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의 영화 <간디>, 1982년 개봉되어 간디의 환생이라 할 정도로 싱크로율 100%의 벤 킹슬리가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는 등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수상했다.

 

간디는 종교적 신념을 원동력으로 하여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변 하는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구도자의 자세로 한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무엇보다 위대한 것은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를 돌보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인격은 명상 속에서만 싹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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