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아시모프
(1920~1992)
아이작 아시모프는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께 SF계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20세기 최고의 과학 소설가이자 교양과학 저술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영향력은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생화학자로서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과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깊이를 결합한 작품들을 남겼다.
SF 거장의 우주 이야기
"우주 비행과 달 여행은 로마 시대 이래로 상상 문학의 주요 소재가 되어 왔다. 쥘 베른과 H.G. 웰스는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달 여행에 관한 책을 썼다. 분명 로켓을 현실로 여기기 시작한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SF(Science fiction, 공상 과학 소설)를 읽었다. SF가 그들에게 로켓에 관해 가르쳐 주었다는 말은 아니다. 웰스는 달에 가는 데 반중력 장치를 사용했고, 베른은 거대한 대포를 사용했는데, 이 두 장치 모두 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상력을 자극했고, 많은 사람들이 달나라 여행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주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중 전쟁 무기로 로켓이 개발되었고, 이것은 과학 탐사, 궤도 비행, 달과 그 너머로의 여행을 위한 장치로 생각하는 공학자가 늘어났다. 이를 사람들은 비웃지 않았다. SF가 그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SF의 영향」이라는 에세이 중에서 뽑은 대목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SF를 씀으로써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SF를 변화의 사실,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문학의 한 갈래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볼 때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생활 방식 전체를 변화시켜 왔다. 불의 발견, 바퀴의 사용, 인쇄술의 발명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를 둘러보자. 더구나 변화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안전이 보장되고, 그 결과 다시 과학 기술의 발전을 추가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인구가 더 늘어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낳는 것은 과학 기술자 집단이다. 하지만 이들이 발전시킨 기술은 금방 사람들에게 파급된다. 따라서 이처럼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고, 여기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에 대비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그런데 아시모프가 보기에 사람들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는커녕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때 SF가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SF는 변화를 수용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글이 바로 이런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아시모프는 특정 SF 작가가 특정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주장을 보탠다. 그는 헝가리 과학자 레오 실라드가 1930년대 중반에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02년에 발표된 웰스의 단편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이 단편에 처음 ‘원자 폭탄’이라는 말이 나온다. 또 다른 예로 오늘날에는 로봇이 공장에서 사용되는 일이 보편화되고 있고, 심지어 모든 공장이 자동화, 로봇화되는 추세이다. 이것은 누구 한 사람의 공로로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1950년대 말에 로봇 제조 회사인 유니메이션 사를 설립한 잉겔버거의 노력이 크다. 그런데 이것에 관해 언급한 아시모프의 글을 보도록 하자.
“몇 년 전에 들은 잉겔버거의 말에 따르면, 그는 대학교 때 내가 쓴 「나는 로봇」을 읽고 로봇의 가능성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1940년대 양전자 로봇 단편을 쓰고 있었을 때 내 의도는 분명하고 단순했다. 그저 단편을 좀 써서 잡지에 팔고, 대학교 학비를 좀 벌고, 내 이름이 인쇄된 책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SF 이외의 것을 쓰고 있었다면 일어난 일은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SF를 쓰고 있었고, 이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아시모프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살피면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SF 거장의 탄생
아시모프는 1920년 1월 2일 구소련 페트로비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아이작 아시모프’라고 부르지만, 그는 자서전 1권에서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법을 알려준다.
"먼저 ‘Isaac’은 첫 음절에 강세를 두어 읽어야 하고, ‘Asimov’를 읽는 법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has, him, of라는 매우 단순한 3개의 단어가 있다. 이것을 has-him-of처럼 붙여서 발음해 보자. 다음에는 2개의 h를 빼고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그러면 Asimov를 제 소리대로 발음하게 된다."
그의 가이드대로 발음하면 그의 이름은 '아이작 애지머브'로 발음해야 하겠다. 허나 이 글에서는 아시모프로 쓰도록 한다.
아시모프의 아버지는 곡물 상인이었는데, 그가 세 살 때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처음 정착한 곳은 뉴욕의 브루클린이다. 여기서 다섯 살이 된 아시모프는 2월에 유치원, 그해 9월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한 달 뒤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3학년 1학기로 월반을 한다.
그런데 월반을 할 때마다 느닷없이 곱셈을 한다든가, 아니면 전혀 모르던 지리 교과를 배우게 된다든가 하는 곤란을 겪는다. 그러나 아시모프의 천재성은 이런 상황에서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곱셈표를 말끔히 외우는 것으로, 혹은 지리부도를 완전히 외우는 것으로 극복한다.
아시모프는 성적은 항상 최고였던 데 반해 교우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그 주된 이유는 집이 잡화 소매점을 운영해서 그에게는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 일을 거들라는 임무가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교우 관계에는 방해가 되었지만, 잡화 소매점을 꾸준히 거들었던 경험은 그가 나중에 성실히 저작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다.
어머니가 동생을 낳기 전에는 그래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솔로몬 프릿슈라는 친구를 몇 개월 간 사귄다. 그 친구는 이야기에 재주가 많은 아이로,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아시모프에게 들려주곤 했다. 어린 아시모프는 이야기라는 것은 책에만 있는 것이고, 아주 오래 전부터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친구를 통해 비로소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이 친구는 얼마 후 이사를 가 버리고, 어머니가 동생 스탠리를 낳자 아시모프는 잡화점 일에 더 매이게 된다.
대신 그는 휴식 시간만 되면 도서관을 왕래하며 책에 빠져든다. 어떤 안내자도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역사와 과학에 흥미가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고, SF에 대한 관심도 키워 간다.
열 살 때 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 그의 최초의 창작이 시작된다. 첫 작품은 「대학에서의 그린빌 첨즈」로 이 글의 줄거리를 엠마뉴엘이라는 친구에게 들려주자, 너무나 재미있어 한다. 그러나 그는 대학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가 없어서 도중에 쓰기를 포기하고 만다.
아시모프는 중학교에서도 월반을 해서 열두 살에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중학교와는 모든 면이 달랐다. 그는 지금까지 공부 때문에 괴로움을 당해본 적이 없었는데, 고등학교에서 새로 접한 경제학 등의 학문은 그를 괴롭혔고, 몇 과목은 포기한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시모프가 의사가 되길 바랐고, 의과 대학에 가려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컬럼비아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너무 침착하지 못하고, 여유와 자신감이 너무 없고, 한눈에 봐도 믿음직한 인상과는 거리가 먼 모습 때문에 컬럼비아 대학교의 면접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1935년 컬럼비아 대학교의 학부 학교인 세스로우 주니어 칼리지에 입학한다. 학부 시절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SF 잡지인 「어스타운딩 스토리즈」에 최초로 독자 평론을 투고해 자신의 글이 실린 것, 그리고 편집자 존 캠벨을 만난 것이다. 존 캠벨은 글을 실어 달라고 오는 아시모프에게 끊임없이 퇴짜를 놓으면서도 그에게 따뜻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 아시모프는 캠벨이 작가로서 자기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한다.
그는 학부를 졸업하고 여러 의과 대학에 입학 허가를 신청했지만 어느 곳에도 붙지 못하고, 1939년 컬럼비아 대학원 화학과에 진학한다. 화학을 전공하여 1941년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계속해서 박사 과정을 밟다가 1942년부터 1946년까지 군무원으로 근무한다. 생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49년부터 보스턴 의과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1955년에는 부교수가 되면서 종신 재직 자격을 얻지만, 집필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1958년 강의를 그만둔다. 대학원 재학 시절 이후의 삶에서 아시모프에게 가장 중요한 해는 1940년이었다. 1939년 그의 단편이 최초로 SF 잡지에 실린 이후 그는 끊임없이 습작을 해 잡지사에 보낸다.
미래 인류의 모습을 그리다가 별이 된 아시모프
‘로봇’이라는 말은 1920년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펙이 처음 만든 말로, 체코어로 ‘강제 노동자’나 ‘노예’를 뜻한다. 차펙은 인조인간을 대량 생산한 영국인에 관한 희곡 「R.U.R」에서 로봇들이 감정을 얻어 노예제도에 반대하며 인류를 전멸시키는 것으로 그렸다.
이처럼 아시모프의 손이 닿기 전까지 로봇은 괴물로 그려지고 있었다. 로봇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데는 대량 생산에 따른 기계 공업의 발달로 사람들이 기계에 일자리를 뺏기는 상황이 톡톡히 한몫을 했다. 그런데 아시모프는 로봇이 위험할 수도 있지만 분명 안전 요인을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봇 연대기」라는 에세이에서 그가 한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모든 장치는 고유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말은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거짓말도 낳았다. 불은 요리에 사용되지만 무기에도 사용되었다. 나침반의 발명은 항해술을 발전시켰지만 멕시코와 페루의 문명을 파괴하기도 했다. 자동차는 매우 유용하지만 해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 때문에 죽어 간다. 의료 기술의 발전은 수많은 인명을 구해 냈지만 인구 폭발을 심화시켰다. 어떤 일이든 위험성과 오용 때문에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는 점을 시사할 수 있겠지만 모든 지식을 버리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현명하게 사용되고, 위험하지 않으며, 맡은 일을 잘하는 로봇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아시모프는 무절제한 과학 기술의 남용과 맹신 못지않게 과학 기술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과 반발도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널리 알려진 ‘로봇공학의 3원칙’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이래로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인간이 자신의 창조물에 의해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다. 아시모프가 제창한 로봇공학의 3원칙은 1942년 단편 「Runaround」에서 처음 명문화되었으며, 이후 현대 인공지능과 로봇 윤리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첫째, 로봇은 인간을 해칠 수 없다. 또 방관함으로써 인간에게 위험을 초래해서도 안 된다.
둘째, 로봇은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야 한다. 단 그 명령이 제1원칙에 위배되는 경우는 제외한다.
셋째, 로봇은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저촉되지 않는 한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
아시모프가 인간을 위하는 로봇 이야기를 만들면서 로봇의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친숙해졌다. 그의 로봇 소설을 읽고 실제로 로봇 제조 회사가 탄생했고, 오늘날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의 윤리적 기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1세기 들어 로봇과 AI가 일상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아시모프의 3원칙은 여전히 논의의 중심에 있다. 자율주행차, 인공지능 비서, 산업용 로봇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 원칙을 참고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아시모프의 별명인 ‘인간 필기 기계’가 말해 주듯 그는 1992년 죽기 전까지 45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실제로 최신 연구와 출판 기록을 보면, 그의 저작은 500권에 달한다는 평가도 있다3. 그의 작품 대부분은 SF나 교양과학서들이었지만, 미스터리, 역사, 종교, 평행우주, 외계 생명체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다. 1977년에는 《아이작 아시모프 SF매거진》을 창간하여 후배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로봇 시리즈와 더불어, 미래 인류의 역사를 그린 대서사시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있다. 이 작품은 은하 제국의 흥망과 인류 문명의 재건을 다루며, 사회학과 역사학, 과학적 예측을 결합한 독창적 세계관으로 SF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21년부터는 이 시리즈가 애플TV+에서 대규모 드라마로 제작되어, 아시모프의 상상력이 다시 한 번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시모프의 영향력은 『스타워즈』, 『스타트렉』 등 현대 SF 문화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의 ‘심리역사학’ 개념은 데이터 과학, 인공지능, 사회 예측 분야에서도 영감을 주고 있으며, 오늘날 빅데이터와 AI를 활용한 미래 예측 연구의 선구적 아이디어로 평가받는다.
아시모프는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한 과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과학을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만들고, 과학적 발견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예측해서 경고하거나 과학의 발전 방향이 올바른 쪽으로 향하도록 경종을 울린 과학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역할을 SF를 쓰면서 혹은 교양과학서를 쓰면서 훌륭히 해냈다. 그는 과학과 인문학, 예술을 넘나드는 융합적 사고로, 미래 사회가 맞이할 변화에 대한 상상력과 경계심을 동시에 심어주었다.
우리에게도 과학적 발견의 천재뿐 아니라 과학을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통해 체감하게 하는 천재가 필요하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 여러분 중 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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