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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롤모델 이야기/발명가형 위인 롤모델

뤼미에르 형제 – 영화 발명가 – 뤼미에르 형제의 생애

by 백패커 소크라테스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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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mière 형 Auguste Marie Louis Nicholas 1862∼1954, 동생 Louis Jean 1864∼1948 프랑스의 사진 장비 발명가이자 영화 발명가.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현대의 영화처럼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는 대중영화를 상영했다.

 

시네마의 탄생

 

뤼미에르 형제의 이름은 오귀스트와 루이이다. 형 오귀스트는 186210월에, 동생 루이는 186410월에 프랑스의 브장송에서 태어난다. 아버지인 앙투안 뤼미에르는 처음에는 화가로 활동하다가 사진작가로 전업한다. 그는 리옹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두 아들이 과학 과목에 흥미와 재능을 보이자 마르티니에르 기술학교에 보낸다.

 

그러던 중 동생 루이가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새로운 필름을 개발하자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사진 간판 생산 공장을 짓도록 지원해 준다. 1894년경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서 사진 회사로서는 유럽에서 최대 규모로 성장한다. 이 무렵 파리에서는 발명왕 에디슨의 새 발명품인 활동 사진기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에디슨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활동 사진기의 이름은 키네토스코프였다. 나무 상자처럼 생긴 이 기계는 중앙에 나 있는 구멍으로 들여다보면 1초에 46개의 사진이 돌아가 영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였다.

 

에디슨은 영화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이 장치를 발명해 놓고도 이것을 장난감 정도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에디슨의 전시회에 다녀온 아버지는 이 기계의 상업적 유용성을 발견하고 형제에게 기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조금 더 발전된 것을 만들어 보라고 권유한다.

 

뤼미에르 형제는 곧바로 이미 발명되어 있는 것들의 성과를 결합하기 시작한다. 먼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에서는 톱니로 필름을 감아 움직이며 그림이 보이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따온다.

 

에밀 레이노가 발명한 시각 극장이란 이름의 기계로부터는 영사 장치, 인화 장치, 촬영 장치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리하여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를 위한 카메라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기계에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이름을 붙인다. 영화를 나타내는 시네마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18952월 뤼미에르 형제는 이 장치의 특허를 냈고, 제일 처음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몇몇 사람들 앞에서 상영한다. 아주 짧은 영상이었는데도 놀라울 만큼 반응이 좋았다.

 

그해 1228일 파리의 카퓌신 거리에 있는 그랑 카페에서 한 사람에 1프랑씩 받고 열차의 도착이라는 영화를 상영한다. 단순히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찍은 매우 짧은 영화였지만 관객들은 자기 눈앞으로 기차가 돌진해 오는 줄 알고 화들짝 놀라 고함을 지르며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날이 바로 영화 탄생의 순간으로 기록된다.

 

뤼미에르 형제는 카드놀이, 아기에게 젖먹이는 모습, 거리의 모습, 군인들이 행진하는 모습 등을 필름에 담았다. 그들은 영화의 발명가이자 사실주의 영화감독으로도 인정받게 된다.

 

그렇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유능한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영화라는 하나의 새로운 문화 양식을 발명한 사업가들로 인정해야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필름 개발 쪽이 더 많은 이윤을 낼 것으로 보고 영화 찍기를 중단한 채 세상을 뜨기 전까지 필름 사업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다.

 

형 오귀스트는 19544월 리옹에서, 동생 루이는 19486월 방돌에서 생을 마감하는데, 이들은 사업가로서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사진 장비 발명가이자 영화 발명가라는 영예도 누린다.

 

영화 춘추전국 시대

 

영화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뤼미에르 형제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든 영화를 보고 당장 카메라를 구입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상상의 세계를 최초로 영화로 만든 프랑스의 직업 마술사 멜리에스였다.

 

그는 파리 근교에 스튜디오를 지은 후, 직접 대본 집필과 정교한 세트를 설계하고, 유명한 배우들을 골라 영화를 찍을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갓 태어난 카메라를 마술사다운 안목으로 조작해 느린 화면을 만들기도 하고, 화면이 사라지면 새 화면이 겹쳐 나타나는 장면도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이 갑자기 동물로 변하는 장면, 두 조각이 나는 장면, 사라져 버리는 장면 등 마술 같은 영화 장면들을 찍어 내었다. 오늘날 멜리에스는 판타지 영화의 시조로 기록되고 있다.

 

다른 한편 에디슨은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에 자극을 받아 카메라의 발명을 서둘렀다. 그리고 드디어 키네토그래프라는, 전지로 움직이는 피아노만큼 큰 카메라를 탄생시킨다. 오늘날의 소형 카메라는 멋진 배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들고 갈 수 있지만 에디슨의 거대한 카메라는 휴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카메라가 있는 곳에 스튜디오를 세워야만 했다.

 

에디슨은 먼저 카메라를 만들고, 카메라가 있는 곳에 스튜디오를 세웠다. 그리고 그 스튜디오를 블랙 마리아라고 이름 지었다.. 블랙 마리아란 미국 속어로 죄수 호송차라는 뜻이다. 뉴욕 허드슨 강변에 있던 이 스튜디오에서 움직임이 불가능한 카메라로 초기 영화가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때의 영화들은 대부분 허드슨 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시카고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의 초기 영화 산업이 흥행에 성공하자, 에디슨은 발명 특허권을 주장하면서 대형 영화사들끼리 뭉쳐 영화 특허권 회사를 만든다. 그러고는 이 회사의 허락 없이는 영화를 촬영할 수 없도록 하고 영화 촬영기기를 사용할 때에는 로열티를 지불하도록 했다.

 

이런 상황에 영화감독들은 하나둘씩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에디슨은 영화 한 편을 20분 길이 이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고, 출연료 상승을 막기 위해 배우 이름을 자막에서 지워야 한다는 등 세세한 것까지 간섭했다.

 

그러자 에디슨의 눈을 피해 영화 장비를 챙겨 국경 지대로 떠나는 일이 속출했다. 그들이 발견한 장소는 날씨도 청명한 미국 서쪽 끝 헐리우드였다. 1913년 이래 미국 영화 산업의 산실은 헐리우드로 굳어진다.

 

미국 L.A에 있는 헐리우드 간판. L.A 국제공항으로 비행기가 날며 내릴 때 헐리우드 간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관객의 시선을 잡아라

 

 

 

영화는 대사가 한 마디도 없더라도 우리에게 의미를 전달해 줄 수 있다. 놀라는 여자의 모습 뒤에 장미꽃 백만 송이 장면을 집어넣으면 꽃을 받아 너무 감격해 놀란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달될 수 있다. 만약 장미꽃 대신 처참하게 부서진 자동차의 모습을 넣는다면 갑자기 일어난 자동차 사고에 놀란다는 내용을 표현할 수 있다. 1929년까지는 이렇게 소리 없는 무성 영화 시대가 펼쳐진다.

 

그 뒤를 이어 유성 영화 시대가 열린다. 무성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처음에 영화에 소리를 집어넣으면 영화의 시각적 예술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야기가 쉽게 전달되는 유성 영화 쪽으로 몰린다.

 

하지만 1935년 무렵부터 가정에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영화가 주는 매력이 점점 사라져 갔다. 제작자들은 텔레비전이 만족시켜 줄 수 없는 면을 모색하던 중 대형 화면만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뤼미에르 형제 이래로 35mm 필름에 담아 온 영상들을 70mm 필름으로 옮긴다.

 

영화의 예술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이 계속 새로워지는 가운데 좋은 영화에 상을 주는 제도도 함께 발전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시상식인 아카데미 상(Academy Awards), 즉 오스카상은 전년도에 발표된 미국 영화 및 미국에서 상영된 외국 영화를 대상으로 우수한 작품과 그 밖의 업적에 대하여 해마다 봄철에 시상한다.

 

1927년에 창설된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주관으로 1929년부터 매년 시상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미국 영화계의 가장 큰 연례행사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92회 미국의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다.

 

시상식 외에도 영화인의 축제로 국제 영화제가 있다. 이탈리아의 베니스 영화제, 독일의 베를린 영화제, 프랑스의 칸 영화제 등이 유명하다.

 

꿈 공장의 공장장들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문화 산업, 영상 사업 등의 이름을 붙여 영화가 공장을 수백 개 가동하는 만큼의 경제적 성과를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분명 영화에는 산업의 특징이 있다. 사람들에게 꿈을 팔고 그들을 환상의 세계로 초대하여 그 마력으로 주머니를 노린다.

 

일상에서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상상들을 더 실감나게 재현하면 할수록 더욱 유능한 감독이 된다. 그러나 그 환상을 만드는 상상력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이 악물고 꾹 참고 하면 된다라는 구호도 소용없다. 정말 필요한 것은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문화와 제도적인 텃밭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 산업을 키우자고 큰소리로 외치면서도 1996년까지 자신의 밭에 뿌릴 씨조차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검열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실험 영화들이 제작되더라도 그 영화를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그런 영화를 접하는 사람은 소수의 몇몇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실망하기는 너무 이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참신한 시선으로 무장한 청소년들이 이 땅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카메라는 어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숨겨진 곳까지 찾아간다. 때 묻지 않은 진실한 그들의 작품이 다듬어져 커다란 스크린에 걸릴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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