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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롤모델 이야기/탐험가형 위인 롤모델

석주명 - 한국인 최초 곤충학자인 나비 박사

by 백패커 소크라테스 2025.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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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

(1908∼1950)
한국인 최초 곤충학자이자 세계적인 나비 연구가. 세계 학계에 유래가 없는 생물지리학상의 불후의 명작 <한국산 접류 분포도>를 완성했다.

 

한줄 논문을 위해 3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하다

 

과학자 중에는 아인슈타인처럼 우주에 대한 수많은 법칙들을 총괄하는 이론을 세우는 이론가가 있다. 이러한 이론 과학자들은 천재적 사고력을 발휘해 세상을 보는 눈을 제공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곤 한다.

 

과학자 중에는 현장을 누비며 자료를 찾고, 찾은 자료들을 맞추고 연대를 측정하고 종류를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은 관련된 소수에게만 알려질 때가 많다. 하지만 유명한 과학자만이 진정한 과학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 이론은 자료에 기대지 않은 채 천재적 발상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석주명

 

 

석주명은 풍부한 자료에 근거한 과학 이론이 자료가 빈약한 과학 이론을 얼마나 결정적으로 뒤엎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 대표적인 과학자이다. 그는 20년이라는 연구 기간 동안 무려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해 분석했다. 그래서 한국의 나비가 248종이라는 것을 발표한다. 과거 학자들은 적은 수의 나비 표본을 수집해서 나비의 종을 분류했기 때문에 같은 종의 나비를 다른 종으로 분류한 경우가 빈번했다. 석주명이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한국산 나비는 844종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연구 결과 248종이라고 밝혀졌다.

 

생물 연구에서는 린네가 제안한 명명법이 통용되고 있는데, ‘속명+종명+그 종의 발견자’의 이름 순서로 한 종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린네의 명명법이다. 그래서 당시 학자들은 새로운 종을 발견하여 그 종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조금만 특이한 개체를 발견하면 그 개체를 하나만 발견하고도 새로운 종이라고 쉽게 분류하곤 했다.

 

나비 연구도 이와 같은 형편이었다. 한국산 나비가 844종으로 부풀려져 있었던 것도 공명심과 자료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학자들의 안이한 연구 태도 탓이었다.

 

석주명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수의 나비를 채집해 연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채집한 표본의 날개 길이, 무늬 등을 암수로 분류해 나온 통계 수치를 그래프로 나타냈다. 이렇게 해서 같은 종이라도 크기가 너무 차이가 난다거나 무늬가 다른 표본을 보고 성급하게 다른 종으로 취급했던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종에 대해 많은 표본을 채집하면, 가령 크기에 대한 그래프를 그려 보았을 때 꼭대기가 하나 있는 산 모양으로 그래프가 그려진다는 것을 알아낸다. 하나의 종에 아주 작은 개체와 아주 큰 개체만을 우연히 발견해 분류하면 다른 종이라고 분류할 정도로 차이가 나지만, 많은 표본을 찾으면 이런 오해를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개체 변이 이론이라고 이름 붙여 발표하기도 한다.

 

몇 개의 표본만을 보고 다른 종으로 분류했던 성급한 연구 태도와 달리, 한 종에 대해 수만 개의 표본을 관찰함으로써 석주명은 결국 한 종의 다양한 변이 범위를 밝혔다.

 

도시처녀나비

 

 

석주명의 연구 성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산 신아종 5종을 발견해 이름을 붙인다. 도시처녀나비, 수노랑나비, 스키타니은점선표범나비, 유리창나비, 긴지부전나비 등 5개가 바로 그것인데, 도시처녀나비의 학명은 곤충 도감에 ‘Coenonympha koreuja SEOK’이라고 되어 있다. SEOK은 석주명의 성으로 린네의 명명법에 따라 석주명의 업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석주명은 우리나라 나비의 이름을 순우리말로 붙이고, 학명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또한 나비의 분포를 지도에 표시해 <한국산 접류 분포도>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생물지리학적 업적을 남겼다. 이 지도는 21대(台)로 구성되어 504장의 지도로 완성되었으며, 나비가 어디에 살고, 어디로 이동하는지, 그리고 농작물 형태와 유행병 침입까지 알 수 있게 한 체계를 구축했다. 이 지도는 사후 여동생 석주선에 의해 유고집으로 출간되어, 오늘날까지도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석주선기념박물관(관장 이종수)에 소장된 석주명 선생의 「한국산 접류 분포도」 친필 원본은 「2024 국립중앙과학관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에 등록됐다.

석주명은 한반도 전역에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나비를 채집했다. 연구가 뒤늦게 시작되었던 것에 비해 생물지리학적인 분포도라는 커다란 결실을 가진 몇 안 되는 나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석주명의 공로라 할 수 있다.

 

 

나비 박사의 성장기

 

 

석주명은 1908년 10월 17일 평안남도 평양의 이문리에서 태어났다8. 아버지 석승서는 평양에서 제일 큰 요리집 우춘관을 경영했는데, 이는 일본식 3층 건물에 50개의 방을 갖춘 대형 요리집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이 유복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석주명은 3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형 석주흥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월남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누이동생 석주선은 복식을 공부해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장을 지냈고, 동생 석주일은 피부과 의사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모든 형제들이 총명한 기운을 키울 수 있는 교육 환경이었을 것이다.

 

왼쪽은 석주선 오른쪽은 석주명

 

 

 

이런 교육 환경은 어머니 덕으로, 그녀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독훈장을 모셔 주기도 했고,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소를 팔아 타자기를 사 줄 정도로 자식 뒷바라지에 열성이었다.

 

석주명은 여섯 살 때 서당에 입학하지만 신식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다.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는 4년제로, 열 살이 되어야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석주명은 여덟 살 때부터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결국 아홉 살 때 나이를 속이고 평양 종로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한다.

 

보통학교를 마친 뒤 그는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숭실고보)에 입학하는데, 이 학교를 택한 것은 보통학교 2학년 무렵 3·1 운동으로 고취된 민족정신 때문이었다. 이 숭실고보는 조선 정신을 키우는 민족교육 학교로 유명했다. 석주명은 숭실고보에 입학해서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연극반 활동에 큰 관심을 가진다. 연극반에는 뒷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등 15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종합 예술다운 연극 공연을 하자는 것이 이들의 욕심이었다. 무대 배경은 자체 제작하고, 첼로는 안익태가, 만돌린은 석주명이 맡았다. 석주명은 기타 연주자가 꿈이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이들은 순회공연을 해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지만 내용이 반일 감정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일본군 헌병대와 경찰서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결국 신의주에서의 공연이 경찰에 의해 중단되고, 학생들은 평양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이듬해 일본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이 숭실고보에도 퍼져 석주명은 학교를 중퇴한다.

 

석주명은 동맹 휴학 사태가 번지지 않았던 개성으로 간다. 거기서 윤치호가 세운 개성의 송도고보에 다시 들어간다. 송도고보는 지금의 대학교 캠퍼스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던 개성의 명문 고등학교였다. 그는 평일에는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기타 치며 노래하는 베짱이였고, 쉬는 날이면 개성 근교로 놀러 다녔다. 자연히 성적은 좋을 리가 없었다.

 

1924년 겨울 방학이 되어 성적표를 받았을 때, 석주명은 반에서 꼴찌였으며, 낙제한 과목도 여러 개 있었다. 이때가 그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된다. 그가 1926년 송도고보를 졸업할 때에는 우등생으로 변해 있었다. 일본의 농업 전문 학교로서 명문이었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 입학한 유일한 조선인으로서 석주명은 유학길에 오른다.

 

 

세계적인 곤충학자로 명성을 얻다

 

 

음악 학교에 진학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석주명이 농학을 택한 것은 송도고보 교장 윤치호가 덴마크의 낙농 기적에 대해 강연한 것을 들은 후 굶주리는 조선을 어떻게 하면 살찌울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농학과에 1년을 다니는 동안 생각이 바뀌게 된다. 그는 동식물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농작물과 곤충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곤충학 중에서도 응용 곤충학을 택해 곤충이 식물의 병과 어떤 관련을 갖는가를 연구한다.

 

석주명이 나비 학자가 되려는 뜻을 굳힌 것은 졸업을 앞두고 늙은 은사 오카지마 교수와 나눈 대화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오카지마 교수는 그에게 졸업 후에 무엇을 하려는지 물은 다음 조선의 나비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한다.

 

널린 돌멩이 중에 보석이 숨어 있듯이 사람들 앞에 있는 연구 과제들 중에 정말 중요한 분야가 있기 마련이다. 오카지마 교수는 조선의 나비 연구가 보석 같은 연구 과제임에도 아직 사람들이 개척하지 못한 분야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조금만 더 젊었어도 그 일에 착수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자기는 너무 늙었고, 대신 젊고 성실한 태도를 가진 석주명이 이 분야에 뛰어들어 10년 정도만 정성을 쏟아 붓는다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으로 보았다.

 

석주명은 며칠을 고민한 뒤 나비 학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1929년 귀국한다. 귀국한 직후에는 함흥의 영생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해 2년을 근무한 뒤, 1931년에 모교인 송도고보로 자리를 옮긴다. 송도고보에서 근무한 11년 동안 연구에 매진해 97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학자가 된다.

 

동료 교사들과 어울리다 보면 연구 시간을 빼앗길 것 같아 석주명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박물관 연구실에 둥지를 튼다. 변변한 참고 서적도 없던 시절, 석주명에게 연구 자료로 주어진 것은 잠자리채 하나였다. 그가 나비들을 채집하고 있을 즈음 <일본 곤충대도감>과 <일본 곤충도감>이 출간된다. 그래서 그는 잡아 놓은 나비 표본들을 곤충 도감과 비교하면서 분류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석주명은 이전의 곤충 도감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점을 발견한다. 나비 표본을 모으면 모을수록 기존의 주장을 뒤집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석주명의 생활은 잠자리채를 들고 미친 듯 산을 헤매는 것과 연구실에 틀어박혀 채집한 나비들을 재고 분류하는 일이 전부였다. 학생들에게는 방학 숙제로 나비 채집이 어김없이 부여되었으며, 희귀종을 채집해 온 학생에게는 무조건 최우수 성적을 주었다. 나비 표본으로 가득 찬 연구실은 점차 개성의 명물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의 지질학자 모리스가 경의선을 타고 경성을 가던 중 실수로 개성에서 내린다. 잘못 내린 김에 개성의 명물이나 구경하려던 그가 소개받은 곳은 송도고보의 박물관 표본실이었다. 모리스는 석주명의 나비 표본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모리스는 연구가 이제 시작된 것이라는 석주명의 말에 더욱 놀라면서 미국의 여러 박물관들과 표본을 교환하고, 미국 연구 재단들로부터 연구비를 얻을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현실로 이루어져 석주명은 미국의 여러 박물관과 나비 표본을 교환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비도 지원받게 된다. 과거에는 자신의 월급과 어머니가 도와주는 돈으로 연구를 해야 했지만, 이제 연구비 걱정 없이 채집 여행을 하고 조수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석주명의 연구에는 가속도가 붙었고, 1938년까지 발표한 논문들로 인해 영국 왕립 학회의 인정을 받아 세계적인 곤충학자로 이름을 얻게 된다.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는 석주명에게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소중한 기회였기 때문에 석주명은 넉 달 동안 학교 일을 미루고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 제국대학교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나비 목록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한다.

이 책을 집필한 기간은 넉 달이지만, 실제로는 10년 동안 써온 책이었다. 영문으로 집필된 이 책은 430쪽에 달했고, 뉴욕에서 인쇄되어 각국에 보내졌다. 지금도 영국 왕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한 한국인 저자의 저서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책은 『조선산접류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1940)으로, 한국 나비 연구의 국제적 기준을 마련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조선산접류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1940)으로, 한국 나비 연구의 국제적 기준을 마련한 저술

 

 

한편 1943년에 경성 제국대학교의 생약 연구소 실험장이 제주도에 개설되는데, 석주명은 교사 일을 그만둔 뒤 그동안 충분히 연구하지 못한 제주도의 나비를 연구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연구소 책임자로 가겠다고 자원을 한다.

 

그곳에서 2년 정도 근무하면서 석주명은 제주도가 육지와 너무나도 다른 것에 흥미를 느껴 나비 연구 외에 제주도 방언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제주도의 자연과 방언, 인구, 문화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해 《제주도 방언집》 등 총 6권의 제주도총서를 집필했다. 전문 분야가 아니었는데도 석주명은 훗날 방언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자료를 남겼다.

 

 

불후의 명작

 

 

서울로 돌아온 석주명은 국립 과학박물관의 동물학 연구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산 접류 분포도>를 완성해 가고 있었고, 나비를 유전학과 관련시켜 연구하겠다는 큰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다.

 

서울이 폭격을 맞아 남산에 있던 국립 과학박물관이 불탔고, 석주명이 평생을 모아 온 나비 표본들도 불속에서 재가 되고 만다. 그의 슬픔은 너무나 컸다. 다행히 그동안 연구해 왔으나 아직 책으로 출간되지 않은 원고들은 배낭에 싸서 잘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동생 석주선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전쟁 중 재가 되지 않은 원고와 표본 일부. 왼쪽 한국 접류 분포도 친필 원고, 오른쪽 나비 표본 32점의 액자

 

 

 

석주명은 며칠을 슬픔에 빠져 있다가 국립 과학박물관 재건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도중에 그는 자신을 인민군 소좌라고 몰아세우는 술 취한 청년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즉사한다.

 

석주명의 시신은 거적에 덮여 도랑에 버려졌다가 그를 찾아나선 가족들에 의해 며칠 뒤에 발견된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비극 속을 헤집어 보면 이렇게 슬픈 사연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나비 박사 석주명은 날아올라야 할 하늘을 남겨 놓고 날개가 꺾이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구 성과는 나비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후학들의 곁을 아직도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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