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Kafka (1883∼1924) 체코 태생의 유대계 독일 소설가.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과 인간 존재의 불안을 날카롭게 통찰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변신〉과 〈심판〉이 있다.
유년의 기억
한 독일어 사전에 ‘kafkaesk’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카프카스러운’이라는 단어인데, 뜻은 ‘수수께끼 같으면서 섬뜩하고 위협적인’이라고 풀이된다. 이렇게 독일어 사전에 올라 있을 정도로 수수께끼 같은 문학은 어떤 문학일까? 그러한 문학 작품은 어떤 사람이 쓴 것일까? 카프카라는 수수께끼의 삶으로 들어가 본다.
프란츠 카프카는 독일어로 글을 썼으나 독일인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이었다. 그의 부모는 어른이 되어 프라하(현재 체코의 수도. 그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로 이주한다. 그래서 카프카는 유대인의 후예, 프라하 태생,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체코계 유대인으로 빈민가에서 자라 행상을 하다가 뒷날 잡화상을 경영한다. 그는 건강하고 말도 잘했고 식욕도 왕성했고, 어린 자식들 앞에서 욕설도 하고 줄담배를 피워대던 사람이었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삶의 방식, 교육 방식 등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 율리에 뢰비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친정집은 양조장, 술 도매상을 경영하는 부유한 가문이었다. 외가 쪽에는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허약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카프카는 자라면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의 친가 쪽보다는 외가 쪽을 더 닮았다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프라하의 구(舊)시가지, 아버지의 빈민가와 어머니의 대저택 사이의 경계선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평생 동안 그는 이 프라하의 구시가지에서 멀리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창가에서 거리를 내려다볼 때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기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저 건너 이쪽을 보고 있는 건물에는 대학교가 있고, 왼쪽으로 조금 가면 내 사무실이 있지요. 이 작은 원 안에 나의 일생이 모두 담겨 있어요.”
카프카 가족은 프라하로 온 초기에는 아주 어렵게 살았다. 아버지가 잡화점을 연 지 7년이 될 때까지 아주 작은 집에서 살았다. 이사도 자주 다녔다. 어린 시절 그가 구시가지에서 접했던 것들은 어두컴컴한 방, 음산한 복도, 탁한 유리창, 더러운 마당, 골목의 불안한 분위기였다. 카프카의 놀이터는 좁다란 골목길들과 비좁은 안 뜰이 전부였다.
카프카는 1889년 독일 소년 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그를 매일 학교에 데려다준 것은 가정부였다. 그가 기억하기로 그녀는 마르고 작았지만 위압감을 주었다. 가정부는 카프카가 집에서 얼마나 말썽꾸러기인지를 선생님에게 이르겠다고 항상 협박하며 학교에 데려간 것이다.
물론 한 번도 이르지는 않았지만, 카프카는 항상 오늘은 진짜 이르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에게는 학교 자체가 끔찍했는데, 가정부가 그 공포를 더욱 크게 만든 셈이다.
카프카가 이렇게 겁 많고 주눅 든 아이로 자라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의 자녀 교육은 식탁에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것이 다였다. 차려 놓은 것은 모두 먹어라, 음식 투정은 하지 마라, 빨리 먹어라 하는 식이었다. 이따금씩 내뱉는 아버지의 짧은 명령들이 어린 카프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만 느껴졌다.
카프카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명령처럼 수수께끼이고 불확실하다고 느낀다.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이란 자신의 손안에 쥔 것, 입 안에 있는 것이 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카프카에게 더욱 괴로움을 준 것은 아버지가 정작 아버지 자신이 한 말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부조리함에 대한 느낌으로 가득차게 된다.
카프카는 여동생 엘리에게 그녀의 아이들은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보내라고 충고하면서 부모님들의 이기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쓸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나타냈다.
부모들은 흔히 어른들이 여느 아이를 대하듯이 그렇게 자유롭게 자기 아이들을 대하지 못해. 자식은 자기 피라고. 아버지는 아이를 기를 때, 그 자신이 싫어해 왔으나 극복할 수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꼭 없애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자기 안의 나쁜 것들을 아이에게서 발견해.
어린아이는 약하니까 그런 요소의 힘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그래서 아버지는 아이가 크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덮어놓고 노발대발하여 만들어지고 있는 인간을 움켜잡는 거야. 그리고 꼭 있어야 될 것들이 아이에게 없다는 걸 발견하곤 그것을 아이에게 두드려 박아 넣기 시작해. 하지만 두드려 박아 넣는 동안 아이를 부수고 말지.
성장, 사랑, 죽음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때에는 독일 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통일을 주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각축을 벌이다가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지면서 이후 헝가리 왕국을 독립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왕위를 겸하고 있었다.
카프카가 인문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 다닐 때 그곳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필요한 관리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김나지움은 라틴어나 그리스어 같은 고전어를 회초리로 때려 가며 외우도록 했지만, 독일어, 미술, 음악, 체육 교육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김나지움에서 카프카의 성적은 중간 이상이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이 낙제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이 시기에 카프카는 세상과 이어지는 끈이 필요했고, 그래서 필사적으로 친구를 찾았다. 그 친구가 단 한 명의 친구, 오스카 폴라크였다. 카프카는 그를 ‘나에게는 창문과 같은 존재, 그것을 통해 내가 골목길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글을 읽은 유일한 친구가 바로 폴라크였다. 지금은 다 태워 버린 습작들을 말이다.
카프카는 졸업 시험을 통과한 뒤 몇 주 동안 여행을 갔다가 프라하 대학교에 입학한다. 철학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오스카 폴라크를 따라 화학과에 들어갔다가 단 2주 만에 법학과로 옮긴다.
하지만 카프카는 법학 강의를 한 학기도 견디지 못하고 예술사와 독문학 공부를 위해 뮌헨 대학교로 옮기려 한다. 하지만 이 바람은 좌절되고, 프라하 대학교에 남아 다시 원하지 않던 법학 공부를 계속한다. 로마 민법, 부동산 강제 집행 등의 강의를 듣다가 지루해지면 책 가장자리에 낙서를 하곤 했다.
카프카는 최소한의 시간만을 투자해 1906년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그리고 이듬해 보험 회사에 취직했다가 근무 시간이 너무 길어 글을 쓸 시간이 없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1908년 노동자 재해 보험국에 들어 간다. 여기서는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일하면 되었고, 그는 퇴근 후에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 1922년 고질병이던 결핵 때문에 퇴직하기까지 14년 동안이나 이 회사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마흔한 해를 살다 가기까지 카프카는 죽기 직전 단 1년 동안만 가정을 꾸린다. 그와 동거한 여인 도라 디아만트 외에 그의 삶에 세 여 인이 더 있었다. 펠리체 바우어, 율리에 보리체크, 밀레나 예젠스카가 바로 그들이다.
1912년 펠리체 바우어를 처음 만나 2년 뒤 약혼을 한다. 그러나 약혼이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고 구속된 느낌만 받아 카프카는 약혼 한 달 만에 파혼을 하고 만다. 파혼이 그에게 자유로운 영감을 불어넣었을까? 파혼 직후 그는 엄청난 속도로 글을 쓰기 시작해 불과 6개월 동안 세 작품을 완성한다. 3년 후 여름 펠리체와 다시 약혼했다가 그해 겨울 다시 파혼한다.
그 후 요양지에서 체코 소녀 율리에 보리체크와 만난다. 율리에와 사귄 지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그녀와 약혼하지만, 이번에는 가난한 집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해 약혼은 깨지고 만다.
그러다 1920년 병가를 얻어 요양을 하던 중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밀레나 예젠스카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처음에는 카프카의 작품들을 체코어로 번역하는 일 때문에 편지를 주고받다가, 어느새 사랑이 싹튼 것이다. 하지만 밀레나는 이미 결혼 한 몸이었고, 자유분방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카프카 쪽에서 밀레나를 멀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는 마치 법칙이기나 한 것처럼 사랑을 접고 난 후 더 왕성한 창작 활동이 이어진다.
불면증과 후두 결핵에 걸려 투병하던 카프카는 죽기 1년 전에 발트해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도라 디아만트를 만나 드디어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그때 그의 병세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결국 1924년 6월 3일 그는 숨을 거둔다.
미로에 갇힌 생쥐처럼 출구가 없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소재로 삼은 책은 아니다. 동물이 나온다고 해서 우화도 아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공감할 수 없는 무슨 신화 같은 이야기도 아니다. 사상서 같은 소설책도 아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일까? 카프카 소설은 읽어 봐야만 비로소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 있다. 음식처럼 입맛에 맞는 사람은 열광하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카프카의 소설은 리얼리즘, 모더니즘, 낭만주의, 초현실주의 등 특정한 사조의 이름으로 묶기가 어렵다.
카프카의 대표작으로는 장편소설 〈심판〉, 〈성(城)〉, 〈아메리카〉와 중편소설 〈변신〉, 단편소설 〈사형 선고〉, 〈유형지에서〉, 〈단식 광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지 한참 뒤인 2차 세계대전 후에 막스 브로트라는 친구에 의해 출간되었으며, 프랑스 등 다른 나라에서 먼저 주목받기 시작한다.
실존주의자들은 카프카를 자신들의 선조로 생각했다. 여기서 실존주의란 개개인이 자기의 본모습을 찾아 연구하고 탐색하려는 철학 사상을 말한다. 카프카가 실존주의의 선조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는 한 개인이 하나의 조직, 가령 관료 사회와 같은 조직 속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버지는 나의 생물학적인 아빠가 아니라 바로 이 사회라는 실체와 같은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는 무의식을 억압하는 초자아가 바로 ‘아버지의 목소리’이자 ‘사회적 금기’라고 보는데, 카프카의 글에서는 바로 이것이 느껴진다. 카프카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에 의해 인간이 소외당하는 현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소설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은 거대한 조직이나 아버지의 목소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석하지도 않는다. 억눌림을 당하고 있는 여러 방식들이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답답해지고 아득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야기인 듯했던 그의 소설이 사실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로에 갇힌 생쥐처럼 출구를 찾지만 출구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출구가 애초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는 스무 살 무렵 친구 오스카 폴라크에게 이렇게 쓴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때려 우리를 깨닫게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겠어? 네 말대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도록? 세상에 맙소사. 책을 읽어 행복할 수 있다면 책이 없어도 마찬가지로 행복할 거야.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책이라면 아쉬운 대로 자기 스스로 책을 쓸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대단히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이야.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해.
카프카는 이런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여 우리에게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깨닫게 하는 책을 썼다. 그가 의도한 자극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자극이기도 하다. 인생을 마냥 행복하게 느끼는 사람이나 인생을 마냥 불행하게만 느끼는 사람이나 모두 읽어 보아야 할 작가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의 장편소설을 덥석 붙잡지는 말자. 먼저 흥미로운 단편들부터, 그리고 중편, 그다음 장편으로 나아가면서 읽기 바란다. 이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카프카에게 끝내 다가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글이 내 마음에 어떤 흔적을 남겼다면, 프라하에 여행을 갔을 때 프라하 성의 황금소로, 카프카 박물관, 카프카가 살았던 집 앞을 걸어보자. 그와 우리 삶의 부조리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