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ven Allan Spielberg (1946∼) 전세계에 E.T. 신드롬을 일으킨 미국의 영화감독. 그의 영화는 현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의 원형. 《타임》은 그를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 올렸다.
스필버그라는 야생마를 사로잡은 8mm 카메라
스티븐 스필버그는 1946년 12월 18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난다. 전기 기술자인 아버지가 새 직장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 탓에 가족들의 고생 또한 말이 아니었다. 뉴저지 주 하돈필드로, 애리조나 주 스코츠딜의 교외로, 캘리포니아 주 새러토거로…….
게다가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유대인인데도 유대인 거주 지역에 사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잦은 이사와 함께 제한된 지역에 살고 있는 그의 외로움은 더해만 간다. 스필버그는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수년 동안 가족 이외의 유대인을 모르고 지냈다. 내가 알고 있는 유대인이라면 오직 가족뿐이었다.”
어릴 적 그는 한마디로 악동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스필버그가 낮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 그에게는 여동생이 3명 있었는데, 이들은 스필버그의 고문에 가까운 놀이에 항상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는 아이디어 상품점에서 플라스틱 해골을 구입해 그 속에 회중전등을 설치한 뒤 장롱 안에 넣어 두곤 했다. 그리 고 여동생들을 그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은 다음 그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를 즐겼다. 어떤 때는 미라처럼 화장실 휴지로 얼굴을 감고 갑자기 동생들의 방으로 들어가 놀라게 하는 등 오빠의 장난으로 동생들은 재미와 공포의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필버그를 단숨에 사로잡은 일이 생긴다. 바로 영화 촬영이었다. 그가 무비 카메라를 가지게 된 것은 열두 살 때였다. 원래는 가족 여행 장면을 담기 위해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선물한 8mm 가정용 무비 카메라였는데, 스필버그는 아버지가 단순한 장면만 찍는다고 불평하면서 자기가 가족 전속 카메라맨이 되겠다고 나선다.
아버지는 흔쾌히 카메라를 아들에게 넘겼고, 이때부터 가족들은 그의 ‘액션! 컷!’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가 되어야 했다. 스필버그가 찍은 최초의 영화는 장난감 기차의 충돌 장면이었다. 분명 장난감 기차였는데 영상을 보니 실제 충돌 장면처럼 보였다.
가족들도 서서히 그의 재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스필버그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도움이 된다. 즉 유대인이라고 놀림받고 따돌림당하던 고등학교 시절, 매일 그를 괴롭히던 아 이에게 영화의 주인공 자리를 제안하며 친구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한 다. 이 일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어려운 시도임에 틀림없었다.
“내 영화에 출연할 때조차 나는 그가 무서웠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갈 수 있었다. 그곳은 카메라 앞이었다. 나는 카메라가 얼마나 멋진 도구이고 무기인지 그때 깨달았다.”
이 일은 영화가 그의 오랜 벗이 될 것을 확인해 준 사건이었다. 이러한 성장기를 바탕으로 스필버그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파벨만스>(2022)에서 담아냈다. 이 영화는 그의 유년기와 가족, 영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성장통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파벨만스>는 골든글로브 작품상·감독상, 토론토국제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며 스필버그의 현재진행형 거장임을 입증했다.
스필버그의 어머니는 용감했다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은 교육열도 높고 교육을 효과적으로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옛날 한 공익 광고에서 한국의 어머니는 ‘오늘 학교에서 뭐 배웠니?’라고 묻는 반면 유대인의 어머니는 ‘오늘 학교에서 무슨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는 비교를 했었다. 창의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어머니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이야기이다.
스필버그와 같은 재치 있는 감독을 만들어 낸 어머니는 어땠을까? 어머니 리아는 아이들이 싸움을 하고 있으면 그들의 주장을 일일이 들어본 뒤 싸워도 될 이유라면 계속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또한 스필버그가 고등학생 때 찍은 전쟁 영화에서 허둥대며 엄청난 속도로 차를 모는 역할도 흔쾌히 해 주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쓸 가짜 피가 필요하다면서 체리 30통을 끓여 달라고 하면 기꺼이 끓여 주었고, 끓이다가 사방으로 튀어 집이 엉망이 되어도 아무 말 없이 집안을 청소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스필버그가 자신이 찍은 영화를 하루라도 빨리 편집하기 위해 꾀병을 부리며 학교를 결석하려고 하면 뻔히 알면서도 눈감아 주곤 했다. 고등학생인데 덧셈을 손가락으로 하는 답답한 모습을 보면서도 말이다.
“사실 나는 아들을 방관한 셈이에요. 스티븐이 하는 짓은 아주 별났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런 아이를 지도하는 책도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내 친정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언젠가 온 세상 사람들이 저 아이의 얘기를 듣게 될 거야’라고 말이에요. 내가 아들의 기를 꺾지 않도록 그렇게 말했던 것이죠.”
이런 어머니 덕에 그는 맘껏 영화감독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라서다
스필버그는 고등학생이던 1962년, 〈이스케이프 투 노웨어(Escape to Nowhere)〉라는 작품으로 십대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다. 이 영화에는 밀가루를 이용한 특수 효과로 연기가 자욱한 전쟁터를 15분 동안 필름에 담았다. 여동생들과 친구들을 배우로 내세웠고, 제작비도 50달러에 불과했지만 심사 위원들의 눈에는 꽤 괜찮은 작품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두 가지 슬픈 일이 닥친다. 그 하나는 부모님의 이혼이었다. 그동안 불화가 있었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기를 기다려 스필버그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이혼한 것이다. 이 일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로 남는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영화학과가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한 일이었다.
결국 진로를 바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 롱비치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지만 이 대학에는 영화 제작 코스가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모든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영화 제작을 한다.
대학 재학 시절 그가 만든 영화를 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때 그의 영화는 프랑스 출신의 영화감독인 고다르나 이탈리아 출신의 영화감독 안토니오니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내용과 장면이 많았다고 한다.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짝지어 놓은 듯한, 이를테면 예술 영화들을 모방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데니스 호프만이라는 동료 학생이 프로듀서를 맡겠다며 스필버그에게 감독직을 부탁한 것이다. 그렇게 1만 5,000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해 만든 영화 〈앰블린(Amblin)〉은 그가 프로 감독으로서 만든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앰블린〉은 22분짜리 흑백 무성 영화였다. 젊은 남녀가 모하비 사막에서 태평양까지 히치하이크를 즐긴다는 내용이 전부였던 이 작품은 스필버그 자신은 그리 만족하지 못했지만 애틀랜타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고,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도 상을 수상한다. 더구나 유니버설의 텔레비전 부문의 중역인 샤인버그가 이 영화를 본 다음날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스필버그에게 7년 간의 전속 계약을 제안한다.
스필버그는 자신에게 상업적인 성공이 지나치게 빨리 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앰블린〉의 제작 목표 중의 하나가 영화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자기 같은 애송이를 채용하리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에게 프로 감독의 길은 열렸다. 그리고 그 뒤 몇년 동안 〈결투〉(〈대결〉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같은 텔레비전 영화를 제작한다. 그가 만든 최초의 극장용 영화는 〈슈가랜드 특급〉이었다. 좋은 영화라고 평가되기는 했지만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 뒤 스필버그는 그의 대표작 〈조스〉를 만듦으로써 일약 스타 감독의 반열에 성큼 올라선다.
스필버그, 전세계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다
조스는 거대한 식인 백상어가 휴양지를 공포 속으로 빠뜨린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1975년 발표되자마자 전세계의 어른과 아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1977년에는 〈미지와의 조우〉라는 SF 영화를 발표해 또 한 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물론 그 뒤 〈1941〉 같은 흥행 실패작이 있기는 했지만 1981년 〈레이더스—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라는 영화를 제작해 자신의 실추된 명성을 멋지게 회복한다. 하지만 〈레이더스〉로 시작해서 〈인디애나 존스〉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들에 대해 비평가들은 단순한 오락 영화일 뿐이라며 혹평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름을 관객들에게 분명하게 각인시킨 작품은 바로 1982년에 발표된 〈E.T.〉이다. SF 형식의 영화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그의 자전적인 영화라는 점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엘리엇이 바로 유년 시절 자신의 모습이었다. 친구도 없고 부모님의 이혼으로 쓸쓸해하던 소년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특별한 친구 E.T.는 그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온다. 둘의 우정 이 전하는 잔잔한 감동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 뒤로 〈컬러 퍼플〉, 〈태양의 제국〉, 〈올웨이즈〉, 〈후크〉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관객과 비평가의 입에 그의 이름이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유명세를 탄다.
그러다가 1993년 자신의 영화 인생에 큰 획을 긋는 두 편의 영화를 발표한다. 바로 〈쥐라기 공원〉과 〈쉰들러 리스트〉이다. 이 두 영화는 그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중요한 작품들이다. 〈쥐라기 공원〉에 담긴 기발한 상상력과 제작 기술의 결합은 개봉 당시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 작품이란 명예를 그에게 안겨 주었다.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는 ‘홀로 코스트 유대인 대량 학살’라는 어두운 주제를 진지하고, 자기 성찰적으로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게 한다. 이 작품을 발표하기 전까지 스필버그는 사회 현실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을 피하면서 상상의 세계에만 머무는 감독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비평가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불식시키며 그의 영화적 영역을 확대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21세기 이후의 스필버그: 거장의 현재진행형
그는 <맨 인 블랙>, <트랜스포머> 시리즈 등에서 제작자로서도 활약했으며, 1994년 드림웍스 SKG를 공동 창립해 할리우드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1998년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로 다시 한 번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도 <마이너리티 리포트>, <캐치 미 이프 유 캔>, <터미널>, <우주전쟁>, <뮌헨>,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링컨>, <마이 리틀 자이언트>, <더 포스트>, <레디 플레이어 원> 등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영화를 연출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고 있다. 2021년에는 첫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선보이며, 인종과 세대 간 갈등, 관용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2022년 <파벨만스>는 그의 34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자전적 성장기와 가족애, 예술에 대한 열정을 담아내며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받았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창시자이자,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거장이다. 그의 영화는 유년의 몽상과 가족, 사회적 메시지, 첨단 기술의 결합을 통해 전 세계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오늘날에도 그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살아 있는 영화사의 한 페이지다.
“어때 즐겁지 않아?”
관객을 놀려 줄 일들을 생각하며 두 손을 입에 대고 숨죽여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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